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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던힐, 꿈과 용기, 그리고 열정으로 일구어낸 꿈!

글로벌 시니어 브랜드 디자인 팀 2015.05.04. 조회수 12,825 Tag #브랜드 디자이너 #디자인 #다자이너

 


 
「글로벌 시니어 브랜드 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

현재 리치몬트 그룹 소속 알프레드 던힐의 런던 글로벌 헤드 쿼터에서 브랜딩을 담당하는 시니어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주요 업무는 알프레드 던힐(영국 남성 명품 브랜드)의 윈도우 디자인과 매니지먼트. 윈도우 쇼케이스 디자인을 하고, 가이드라인을 만든 후, 중국(118 stores), 아시아 퍼시픽(47 stores), 유럽과 아메리카 (20 stores) 등 세계적으로 디자인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각국의 비주얼 머천다이저 매니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퀄리티를 체크합니다. 그 밖에 시즈널 매거진, 룩북 디자인, 포토슛 등의 디자인 담당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직업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아무런 연고지도 없는 영국, 예술의 본고장 런던에서 디자인 공부를 해보겠다며 한국을 떠난 지 어느덧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부터 성대한 꿈을 품고 유학 준비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작은 마케팅 회사에서 그래픽과 웹, 그리고 이벤트 관련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던 아주 평범한 컨셉 디자이너였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영국 아트 대학 교수진들이 한국을 방문해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심사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별다른 생각 없이 포트폴리오를 들고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른 나라의 학생들을 만나고 심사를 하는 그분들로부터 왠지 내 포트폴리오에 대한 심사평을 받고 싶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생각보다 호평을 받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학생 시절 내가 끄적이는 종이 한 장이라도 나중에 소중한 기억이 되리라는 생각에 꾸준히 모아 정리해둔 컨셉 스케치북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모인 스케치북과 최종 작품을 함께 보면 4년간 끊임없이 발전해 온 아이디어와 디자인 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영국 교수님들과 대화를 하며 저는 유학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유학 준비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리고 2004년 9월 3일. 가방하나 달랑 들고 처음으로 런던 땅을 밟았습니다.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 내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잘 인식하지도 못한 채, 막연히 6개월 동안 어학 공부를 시작했지요. 틈틈이 시간이 나면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가서 그 학교 학생이 되어보는 상상을 해 보았고, 그곳 학생들을 만나 수업방식과 경험담을 들으며 가슴 뭉클 솟아오르는 정체 모를 감정을 마음속에 담아 두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흐른 후, 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유학 준비를 추진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를 방문해 본 후, 가고 싶은 학교와 전공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입학 조건으로 제시된 영어 성적과 학업 계획서, 포트폴리오와 작품 제안서 등을 3개월에 걸쳐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원서를 내고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코스가 시작되기 한 달쯤 전에 학교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영국, 세인트 마틴 대학원 입학!

대학원 유학 생활은 어땠습니까?

제가 선택한 학과는 런던 아트 & 디자인 대학에 속해 있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 컬리지의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석사 과정이었습니다. 2년 과정으로 그래픽 디자인, 포토그래피, 일러스트레이션과 미디어 디자인 수업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중 그래픽 디자인은 또 다시 편집 디자인, 인포메이션 디자인. 그리고 타이포 그래피 & 랭귀지로 나뉘어 총 6개의 그룹이 형성됩니다. 제가 입학했을 당시, 세계 각지에서 온 91명의 학생이 커뮤니케이션 수업을 듣기 위해 모였는데, 학생들은 위에서 언급한 그룹 중 한 곳을 선택해 수업을 듣기 때문에 실제로는 15명 정도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사과정은 학사와 다르게 자유롭게 주제를 결정하고 스스로 작품을 발전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튜터, 교수진들은 그 작업을 더욱 흥미롭게 다양한 방면으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중간평가를 합니다. 수업 과정 중 필요하다면, 다른 그룹의 수업을 들으며 과를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3단계에 걸쳐 평가를 하는데, 첫 번째는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에 대해 연구하고 함께 작업하는 그룹 프로젝트와 3개월간 2주마다 주어지는 프로젝트를 하는데서 10점, 6개월 간 논문을 쓰고 논문 주제를 증명하는 실기 프로젝트를 하는 데 70점, 그리고 1년 동안 최종 작품을 완성시키는 과정과 프로젝트를 지켜보며 평가하는 데 100점을 주어 총점 180점 만점에서 평가를 받게 됩니다. 2년이라는 시간을 매우 알차고 즐겁게만 생활했던 것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네요. 3개월 동안 2주마다 완성해야 했던 과제는 당시 피와 뇌수를 말리는 듯 했고,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기 때문에 2주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져도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에 내보이는 학생들의 작품 완성도는 언제나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한 주가 지나 서로 아이디어를 발표하면서 교수와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받는데, 칼날처럼 날카롭고 무책임할 정도로 무서운 그들의 피드백은 며칠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만들어 낸 나의 아이디어를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한두 번… 어느 날은 수업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작업을 몇 주간 그만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수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였지요. 그렇게 3주 정도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은 채, 잘한다는 친구들의 작업 활동을 관찰·연구하고 교수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저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얻은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심플했습니다. ‘이유 있는 디자인, 컨셉 있는 디자인. 결과보다는 과정이 흥미롭고 유머와 위트가 있으면서도 기능성을 갖춘 색다른 디자인 아이디어를 창조’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와도, 그 안에 창의적인 스토리가 있으면 발전 가능성을 보고 방향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2년의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지나갔습니다. Fail해 본 적도 있고, 다시 도전하기를 몇 번... 그렇게 마무리 한 최종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아 런던 아트 대학에서 졸업 후 진행하는 MA BEST DESIGN SHOW에서 한 달 동안 전시를 하게 됐습니다. 이는 런던 아트 대학교를 구성하는 6개의 컬리지에서 20명을 선정해 진행하는 특별 전시로 이러한 명예로운 전시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했고, 한 편으론 그 동안 흘렸던 수많은 눈물과 땀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모두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작


유학을 마치고 곧바로 취업하셨나요? 영국에서의 취업활동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렇게 졸업식을 마치고는 4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4개월 후면 비자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1년 기간의 비자를 신청해야 했습니다. 그 결정의 갈래 길에 서서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4개월 안에 죽을 힘을 다해 일을 찾아보았는데 뭔가 얻지 못한다면, 1년을 연장해 일을 찾는다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두 번째는 내 작품과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큰 회사나 작은 회사, 그 어느 곳에서라도 YES를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양쪽에서 모두 NO라는 대답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매킨지, 아센쳐, P&G, 존슨 & 존슨, 에스티로더, 로레알, 디아지오 같은 대기업부터 펜타그램, 란도, 인터브랜드 등 디자인 에이전시까지 취업하고 싶은 회사들을 50곳 남짓 리스트를 만들고, 하루에 세 곳씩 직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방문해 인터뷰 기회를 요청했습니다. 우선, 저에 대한 브랜딩을 해서 매일 밤 세 권의 소개서와 이력서를 브로슈어 책자로 만들어 바인딩을 했습니다. 포트폴리오를 CD에 담아 직접 브랜딩한 CD케이스에 넣고 대학원에서 같은 그룹 학생들과 출간한 책과 함께 역시 브랜딩한 박스에 넣어 세 세트씩 들고 다녔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곳도 있었고, 기분 좋게 받아 주고 차를 대접해 주며, 프레젠테이션까지 다 들어 주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두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 곳은 에스티로더 인하우스 디자인 팀, 그리고 다른 한곳은 꿈의 회사 란도 어소시에이츠였습니다. 에스티로더의 디자인 헤드쿼터는 런던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전화 인터뷰를 요청하는 연락을 받았고, 그 즈음 란도에서도 인터뷰를 요청하는 이메일이 왔습니다. 설레는 마음 뒤,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에스티 로더와의 첫 번째 전화 인터뷰에서는 정말이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혼자 떠들긴 했는데 질문에 답변은 잘한 건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바로 한 장의 봉투를 받았는데, 그 후 얇은 봉투를 받는다는 것은 공손히 거절하는 레터라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바로 피드백을 담을 이메일을 보냈고, 여느 때처럼 나의 인터뷰가 어땠는지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예를 담아 질문했습니다. 한 회사에서 거절당하고 그 이유를 아는 것은 그 다음 회사에 어플라이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경험자의 눈에서 떨어질 만한 이유를 수정하지 않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게 된다면 같은 이유로 떨어 질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란도의 인터뷰는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2명의 심사원이 들어와 3시간 반이 넘게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토론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후, 가슴 조이는 한 달을 보내고 나니, 란도에서 2차 인터뷰를 보러 오라는 이메일이 왔고, 전 또 다른 두 명의 시니어와 함께 1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첫 직장을 잡기까지는 얼마나 걸렸습니까?

그렇게 하루에 세 권의 포트폴리오 세트를 만들어 매일 같이 세 곳이 넘는 회사를 방문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세 달이 훌쩍 지나가더군요. 몸도 지쳐갔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란도에 희망을 걸어보긴 했지만 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아무런 연락 없이 무색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이렇게 공부만 하고 돌아가면 왠지 제자리로 돌아갈 것만 같은 불안감이 가장 컸고요. 답답한 마음에 하느님, 예수님, 그리고 보살님까지 찾아가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 미래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됐습니다. 지금 어플라이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학생의 신분이 아닌, 당당하게 정장을 입고 입사하고 싶은 회사에 걸어 들어가는 멋진 디자이너로서의 모습. 각지의 사람들과 미팅을 하고 인터내셔널한 글로벌 회사에 저의 디자인을 적용시키고 있는 모습. 그때의 성취감, 그리고 뿌듯함. 그 모습들을 상상하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니, 가슴속에 품어 두었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웹 서치를 하는데, 어플라이했던 에스티로더에서 다시 같은 포지션으로 TO가 났더군요.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진심어린 이메일로 예전에 인터뷰를 봤던, Laura에게 로더에 대한 저의 열정을 전달했습니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요. 시간이 되면 직접 찾아올 수 있겠냐며 Laura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고 나니 란도에서도 세 번째 인터뷰를 보라는 이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우선 란도와의 세 번째 인터뷰를 잘 마치고, 로더와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는데, 인터뷰를 보러 가기 하루 전, 뜻밖에 란도에서 합격했다며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합격 서류가 도착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너무 좋아 합격 서류를 기다리며, 로더 인터뷰는 가지 못했습니다. 서류를 받자마자 드는 생각은 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습니다. 다른 곳에 합격했다고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로더와의 인터뷰를 뒷전으로 미룬 당시의 선택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후회가 되더군요. 그리고 Laura에게 시간을 하루 미룬 그 다음 날 인터뷰를 보러가겠다고 연락을 취했습니다. 런던에서 한 시간이 떨어져 있는 사우스 햄톤이라는 곳에 8시까지 오라는 연락을 받고는 그 자리에서 짐을 싸 사우스 햄톤으로 갔습니다. 아침 일찍 Laura를 만났고 2시간의 인터뷰, 그리고 4시간의 실기 끝에 바로 Laura는 팀 멤버를 소개 시켜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란도는 이미 합격한 상태였고 로더에서도 왠지 편안하며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실기시험을 하면서 느꼈지만, 앞으로 계속 이 자리에 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바로 에스티로더 HR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받은 것은 더 이상 얇은 종이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두꺼운 신입사원 환영 책자와 컨트렉트 레터였습니다. 안될 경우를 대비해 한국에 갈 준비를 하면서 신청해 놓았던 선박회사 박스들을 다시 다 돌려보내고 짐을 꺼내 다시 정리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인연이 깊었던 에스티로더가 앞으로 내가 세계로 걸음할 열쇠를 주겠구나 하고. 3개월 전만 해도 내가 에스티로더와 란도 중 어느 회사를 들어가야 할지 골똘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짐 싸서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도 셀 수 없이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멋지게 살아가는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모습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꿈과 겁 없는 용기, 그리고 불타오르는 열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잘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취업 후 적응을 잘하기 위한 노하우, 혹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정말 열심히 하는데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수많은 노력의 나날이 가치 없이 버려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학생 때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며 실패의 과정을 거듭한 경험에서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필드에 나와 실패를 하게 되면, 그 다음의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적게 투자하고 효과적인 성과물을 가지고 나올 때, 능력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 시점이 오면, 열심에만 머무르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일을 하기 때문인지 유럽, 특히나 런던에서는 9 to 5가 가능합니다. 5시에서 5분만 지나도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듭니다. 이 곳에서는 일하는 시간 보다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마감일 전에 일을 잘 마무리만 하면, 능력을 인정해 줍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머지 일을 하는 것은 틀림없겠지요. 그 짧은 시간 내에 수많은 큰 프로젝트들을 성취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 [직업 사전] 디자이너 - 업무, 연봉, 전망

 

 

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 취재기자 김현우 good@jobkorea.co.kr

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
취재기자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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