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커리어 세부메뉴

직무인터뷰 > 기타

피브로사운드, 직업의 의미는 개인이 만드는 것! 힙합뮤지션 가리온

힙합 2015.05.19. 조회수 12,170 댓글수4 Tag #힙합 #뮤지션 #랩퍼

 


 


언제 처음 힙합을 접하게 되었나요?

메타 저는 고등학교 2~3학년쯤이에요.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저는 포크의 감성을 좋아하는 락 마니아였어요. 포크 음악과 시적인 가사를 좋아했거든요. 송창식 씨나 양희은 씨 음악을 많이 들었고 통기타도 쳤어요. 그러다 우연히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랩 음악을 처음 들었는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땐 랩이란 단어도 모를 땐데, 정말 신선했죠. 락 음악을 듣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른 장르를 좋아하는 게 변절자처럼 여겨져서 랩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숨기고 다녔는데, 대학을 가서 레코드사 사장님을 통해서 알음알음 힙합 음반을 찾아 들었고요.
나찰 초등학교 때, 미군부대가 있는 파주로 이사를 갔어요. 그때 저는 키가 크고 운동을 좋아해서 농구를 자주 했는데, 농구를 하러 온 동네 흑인 미군 형들이 들고 온 붐박스에서 흑인 음악을 들었죠. 음악을 들으면서 농구를 하는데, 몸놀림이 달라지더라고요. 그 리듬감 때문에 빠지게 됐어요. 당시에는 한국에 힙합이 들어오기 전이라 SOUL, R&B 음반이 더 많았는데, 사춘기 때는 랩보다는 R&B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노래연습도 많이 했고요. (웃음)


그럼 그때, 랩퍼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나찰 전혀 아니었죠. 그냥 랩이 좋았고 무대가 좋았어요. 숫기가 많았는데, 이상하게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뱉을 때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었거든요. 하얗게 불태운 느낌이었죠. 그땐 직업을 떠나서 그 순간이 좋았어요.

 

그래도 분명히 직업적으로 고민한 시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나찰 20대 후반까지는 직업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아버지가 원하셨던 건 체육선생님이 되길 원하셨어요. 그렇게 제 직업이 짜여 있었고, 저는 랩이 좋아서 계속 무대에 올랐죠. 어느 순간 체육 선생님이 하고 싶단 생각이 없어졌어요.

메타 저는 음악이랑 전혀 상관없는 산업공학을 전공했어요. 대학원을 다닐 때, 제 전공은 CIM이라고 공장 자동화 관련이었어요. 나름 열심히 학교생활해서 종합 시험도 다 패스하고 논문도 준비했는데, 한 과목 시험을 펑크 내서 졸업을 못하게 됐어요.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는 바람에 시험을 못 본 거예요. 음악을 하고 학교생활을 하는 2중 생활을 하다 보니, 시험이 있단 것도 깜빡한 거예요. 그래서 한 한기를 더 다녀서 졸업을 했어요. 제가 98년 여름에 졸업을 했는데, 졸업과 동시에 아까 말씀하신 그런 지점 (직업적 고민의 시기)이 생겼어요. 스스로도 그렇고, 가족들도 랩으로 먹고 살 수 있겠냐고 물어봤어요. 대학원까지 부모님이 도와주신 것도 있고, 부모님의 기대를 꺾는 건 음악 하는 데 걸림이 될 수 있으니, 내가 잠을 줄이고 노력해서 음악을 병행하자고 생각했죠. 그때가 20대였으니까 모험심이 있고 뭔가에 올인할 수 있었어요. 그땐 무대를 포기하고 직장에 가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힙합 뮤지션으로 활동하시고 계시네요.

메타 네. 모든 것들이 역전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로 음악으로 더 활발히 활동할 기회가 늘어났어요. 가리온이라는 팀을 결성하면서 나름 체계도 생기고, 저희가 공연했던 마스터 플랜이란 클럽에서도 저희가 첫 팀이다 보니까 무대에 설 기회가 많이 줬어요. 그래서 자연스레 구직활동을 안 하게 됐죠. 그전에는 이력서도 쓰고, 자소서도 많이 썼어요. 소개해주시는 분도 있었고요. 그런데 마음이 없으니까 적극적으로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게다가 당시에 IMF가 터져서 취업문도 막힌 상황이었고요.

 

그럼, 그 당시 가리온으로 활동하면서 수입은 어느 정도였나요?

메타 아예 수입이 없기도 했죠. 공연에 10명만 올 때도 있는데, 그러면 오히려 클럽이 손해니까요. 그 당시에는 1장에 3천~5천원 하는 티켓 수입에서 20~30%를 뮤지션에게 줬어요. 100만 원 정도 티켓이 판매되면, 뮤지션은 20~30만 원을 받는 거죠. 그런데 공연을 한 팀만 하지 않잖아요. 기본으로 7~8팀이 올라가니까요. 한 3만원인가 받았었나?

나찰 그 정도였죠. 강원도에 있는 초등학교 갔다 왔을 때는 25만 원인가 받았어요.

 

요즘은 예전과 환경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메타 요즘은 공연을 하면, (티켓 판매에 관계없이) 다 페이를 받죠. 인지도가 생긴 팀은 몇 백만 원도 받고요. 그런데 사실 저희가 직업으로 봤을 때, 안정적인 건 아니잖아요. 4대보험이 됩니까, 연금이 나옵니까? (모두 웃음) 최저임금제도 없고, 협회도 없어요. 어떻게 보면, 사업하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직업군으로 볼 수도 있죠. 그런 만큼 다르게 접근해야 해요. 그래서 제2, 제3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기대했어요. 그중의 한 예가 뮤지컬이에요. 저희가 2007년에 ‘래퍼스 파라다이스’란 뮤지컬을 했는데, 저희끼리 이게 랩퍼들에게 또 다른 활로가 되면, 정말 의미가 있겠다고 얘기했었죠. 마치 가수들이 뮤지컬을 하는 것처럼요. 지금은 랩퍼에게 조금 더 안정적인 포지션들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죠. 예를 들어, 나찰은 국제 예술대학에서 전임강사로 있고, 저는 한국국제예술원 학과장으로 있어요. 두 사람 다 기본급이 나와요. 저는 학교에서 4대 보험도 들어줬어요. (웃음) 저희와 미국은 환경이 다르잖아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랩을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요. 그럴 때, 랩퍼들이 개인 레슨이건, 실용음악학원이건, 교육기관 등에서 트레이너로서 가이드를 제공하고, 코칭을 하는 거죠. 그렇게 접근했을 때, 성공한 사례도 있어요. 기술적인 트레이닝을 한 건 아니지만, 키비나 더콰이엇 같은 소울컴퍼니도 힙합문화강좌에서 만난 친구들이에요. 우리나라의 교육적 환경이 특이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한국국제예술원의 프로그램들도 외국에선 이런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상당히 좋게 봐요.

 

이제는 힙합 뮤지션도 음악 활동 외에 거기서 비롯된 직업적 환경이 많이 늘어난 편이네요.

메타 그래서 랩퍼가 앞으로 각광받게 될 수도 있겠죠. 또 한편으로는 거품이 생길까봐 걱정도 되고요. 사실 그런 상황들은 항상 반복됐기 때문에, 저희는 그런 것과 떨어져서 자생력을 가지는 시장이 형성되길 꿈꿨어요.


힙합은 최근 음악 산업의 새로운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힙합이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이 있을까요?

메타 어느 기업에서도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서포트할 수 있는 포지션이 있냐고 물어보셨는데요, 지금 우린 두 개가 없다고 대답했어요. 마스터 플랜이 문 닫은 다음부터 랩퍼들이 설 ‘무대’가 없고, 다른 장르 페스티벌은 호황인데, 우리는 ‘페스티벌’이 없다고요. 지금은 그 두 가지가 필요해요.  


하루 일과가 가변적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성실해지려고 노력해요.

 


대개 뮤지션들은 소속사를 운영하거나 그곳에 속하고 있는데요. 소속사와 뮤지션은 어떤 관계인가요?

메타 회사는 뮤지션을 하나의 상품으로 잘 판매하는 거고, 뮤지션 입장에서는 회사의 역량을 통해 본인의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는 거죠.

나찰 각 회사마다 계약 조건은 다 달라요. 저희는 철저하게 공연 매니지먼트만 저희 소속사인 피브로사운드(Ppbrosound)에서 관리를 해줘요. 음악을 만들어 수익을 내는 건 전반적으로 저희가 하고요. 대부분 뮤지션과 소속사가 관계를 맺을 때는 소속사가 다 관리해주죠. 저희 같은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죠. 피브로사운드의 대표인 자이언 루즈(Zion Luz)와 그전부터 인간적인 관계가 있기도 했고요.

 

소속사의 장단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나찰 음악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편해져요. 그전에는 콘서트를 하게 되면 공연장 섭외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을 저희가 다 처리해야 했어요. 아침에 티켓팅으로 시작해서 할 일이 정말 많아서, 정작 공연 때는 진이 다 빠졌죠.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어요. 단점이라면, 돈을 나눠 갖는다는 거? (웃음) 저희가 소속사 때문에 어려웠던 적은 없었어요.

 

공연을 하거나 음반 작업을 할 때는 어떻게 준비하나요?

먼저 공연장을 섭외해야겠죠. 그리고 전체적인 무대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해요. 일정 기간을 정해서 연습에 들어가죠. 공연 날이 다가오면, 프로모션을 하고, 본 공연을 합니다.

메타 공연은 크게 보면, 나찰의 얘기처럼 돌아가요. 음반 작업은 먼저 프로듀서와 작업 일정을 잡죠. 작업 일정에 맞춰서 나찰과 만나서 곡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가사를 씁니다. 서로 모니터링한 다음, 확정을 지으면, 보컬 레코딩이 맨 끝 단계죠. 예전에는 그렇게 했는데, 지금은 나찰도 저도 사전에 이야기를 나눈 상태에서 각자 역량대로 개인 공간에서 작업을 마무리해요. 저는 지금 작사 방식이 바뀌어서 레코딩 일정을 잡아놓고, 현장에서 가사를 써요.

 

아무래도 하루 일과가 꽤 불규칙할 것 같아요.

메타 하루 일과가 가변적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성실해지려고 노력해요. 성실하다는 건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감각적인 거예요. 저희가 공연을 위해 바짝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것도 감각적인 것을 유지하기 위한 거죠. 곡에 대한 감각이나 집중을 유지하기 위해서 드문드문할 수 없잖아요. 음반 작업도 마찬가지고요.  


‘요즘 친구들 능력이 뛰어나구나!’ 생각해요.

 


많이 물어보는 질문일 텐데요, 힙합 뮤지션이 될 수 있는 루트는 무엇이 있나요?

나찰 요즘 가장 많이 이용하는 방법은 ‘믹스테이프’를 만드는 거죠. ‘사포’라는 친구는 본인의 자기 이름을 걸고, 브랜드를 만들어서 공연을 하는데, 그런 방법도 있고요. 그 외에는 인맥을 통해 공연을 하거나 곡에 참여하는 방법도 있죠. 인맥힙합이라고 나쁘게 보는 분도 있는데, 사실 인맥도 기본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거거든요.

메타 그건 말이 안돼요. 랩을 정말 못하는데 ‘내 조카야’ 이런다고 같이 랩하나? (모두 웃음)

 

자기 실력을 기반으로 네트워크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단 말씀이시네요?

나찰 ‘객관적으로 기준으로 봐서 랩 못하는데, 왜 이 크루에 있나’하는 분도 있는데, 그 사람이 그 크루에 있는 이유가 분명 있거든요.

(*힙합 크루: 회사/소속사와 달리, 소속가수에게 따로 계약/제한을 두지 않고, 멤버간의 활발한 교류를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집단)

메타 제일 중요한 건 실력이 있어야죠. 실력이 없는데, 무작정 믹스테이프 내고 무대에 올라간다고, 반응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웬만큼 실력이 있어도 믹스테이프나 공연 집객이 안 되기도 하거든요. 실력과 함께 끈기, 성실함이 중요하다고 봐요. 모든 것에서 성실함은 가장 강력한 무기잖아요. 앞에서 말했듯이 성실함은 감각이죠. 랩을 한다는 게 몸으로 체득하는 거지, 머리로 외우는 건 아니거든요. 단순히 랩을 많이 하는 건 스스로를 갉아먹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면, 힙합 뮤지션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또 무엇이 있을까요?

메타 엔지니어가 엔지니어링 공부를 안 하면, 엔지니어가 될 수 없잖아요. 랩퍼라는 포지션도 직업적으로 이해하자면, 음악에 대해 인식하고 장르를 받아들이는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되죠. 음악의 흐름과 기술을 파악하고 통찰력도 있어야 돼요.

 

랩퍼가 되기 위해선 정말 다양한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나찰 예전에는 그냥 랩만 할 줄 아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좋은 의미로 자신을 상품화시킬 수 있는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비즈니스에 감각이 있어서 마케팅, 프로모션 내지는 뮤직비디오도 직접 제작하고요. 옷도 디자인해서 입는 친구들도 많아요. 그런 걸 보면, ‘요즘 친구들 능력이 뛰어나구나’ 생각해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 일이 어느 순간 나에게 다른 모든 것을 제공한다면,

 

그게 제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힙합 뮤지션으로서 가장 기뻤을 때,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요?

나찰 항상 같은 대답을 하는데요. 가장 기뻤던 적은 대중음악상 3관왕 했을 때예요. 금전적인 보상이 다 필요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어요. 음악 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어요.

메타 제가 스물여덟 살에 가리온을 결성했고, 지금 마흔 넷이거든요. 그동안 음악이 저한테 패배감을 준다거나 불안감을 느끼게 하지 않았어요. ‘이재현’이라는 사람이 ‘엠씨 메타’라는 랩퍼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이후와 이전의 삶이 너무 뚜렷하게 구분돼요. 음악은 저한테 항상 미래였어요. 과거의 어떤 것으로 발목을 잡지도 않고, 현실의 무거운 혹도 아니고, 미래의 방향을 보여줬어요. 그래서 가장 기뻤던 적도 음악이에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메타 좋은일 연구소에서 오셨으니까 직업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직업의 의미는 개인이 만든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자신의 일을 직업으로 인식하고 시작할 수 있고, 좋아서 하던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잖아요. 저나 나찰은 이걸 직업으로 인식한 적 없고, 좋아서 시작한 경우죠. 직업이란 게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지만, 그 의미만 담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 일이 어느 순간 나에게 다른 모든 것을 제공한다면, 그게 제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 취재기자 김현우 good@jobkorea.co.kr

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
취재기자 김현우

의견 나누기 200자까지 작성할 수 있으며 허위정보 및 명예훼손, 비방, 욕설, 광고성 글은 운영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의견 나누기

0 / 200 등록하기

  • 굳잡 2015-05-21

    가리온! 정말 반가워요! 음악만 즐겨 들었는데 이러한 분들이었군요 ㅎㅎㅎ 답글달기

  • 2015-05-21

    가리온을 여기서! 신기하네요~ㅎ 답글달기

  • 포크 2015-05-21

    포크를 좋아하셨다는게 정말 의외네요 ㅎㅎ 답글달기

  • 가리온 2015-05-21

    힙합퍼들이 존경한다는 가리온!! 답글달기

0 / 200 등록하기

다음글
이롭게, 웹 에이전시의 허브, UI개발자
이전글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홍보 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