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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HR) 직무 취준생을 위한 재미난 정보 - 역사 속 인사 이야기

잡코리아 2015-11-16 13:20 조회수3,275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역량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인사를 시행했을까? 역사 속 인사(人事) 이야기를 살펴보자. 

 

‘탕평채’와 ‘탕평책’은 무슨 관계?
‘탕평채’라는 음식이 있다. 청포묵과 볶은 소고기, 미나리, 계란 지단과 김 가루, 각종 야채들이 한데 어우러져 맛을 내는 음식이다. 조선 21대 왕 영조는 탕평책을 처음 논하는 자리에서 신료들에게 이 음식을 내놓았다. 각기 다른 음식이 한 그릇 안에서 하나가 되듯 신료들도 한뜻으로 국정을 이끌어가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신료들의 끊임없는 반대와 모함에 부딪혀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붕당정치의 폐단을 보여주는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사도세자는 왜 쌀뒤주에서 죽었을까?
1749년, 건강이 악화된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다. 영조가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고 젊은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상대적으로 권력이 약했던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세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정권을 쥘 야망을 품었다. 그러자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과 세자의 계모인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를 모함하고 영조와의 사이를 벌려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계모와 신료들의 거짓말에 속은 영조는 세자를 자주 불러 혼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꾸지람에 가까운 질책이었으나 갈수록 심해지면서 세자를 향한 노여움으로 바뀌어 갔다. 무서운 아버지와 자신을 모함하는 세력 때문에 힘들어하던 세자는 마침내 정신적 압박을 못 이기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놀잇거리로 궁녀를 죽이거나, 기생을 궁에 불러들이고,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조는 노론 세력이 세자의 비행을 열 조목으로 적어 올린 상소장을 받아들었다.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직에서 폐위한
뒤 쌀을 보관하는 뒤주 속에 가둬 굶어 죽게 했다.

 

영조와 정조의 인사(人事)는 무엇이 다를까?
영조가 노론 세력의 꾐에 빠져 아들을 죽게 만든 이 비정한 사건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영조의 정치적 기반 세력은 노론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 세력에 의지해인재를 등용하다 보니 직언을 해줄 충신이 곁에 없었음은 물론이고 신료들과 소통을 방해해 결과적으로 영조 스스로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 탕평책을 실시하긴 했지만 자신과 뜻이 맞는 인재만을 등용하는 등 소극적인 개입만 하다 결국 좁은 뒤주에 아들을 가둬 죽인 매정한 아버지로 역사에 기억되고 만 것이다.
붕당 정치의 가장 큰 희생양인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의 아들 ‘이산’이 파벌 정치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죽고 비로소 자신이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로 즉위하자, 그는 제일 먼저 탕평책 실시를 강권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탕평책이 빛을 보기 시작한 때는 정조가 즉위한 뒤부터였다.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 때부터 이어져 오던 정당인 노론과 소론뿐만 아니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서얼 출신도 등용하였으며 붕당 정치에서 살아남지 못했던 남인 출신을 영의정에 앉히는 파격적인 인사 행보를 보여주었다. 배경을 보지 않고 사람에게만 집중한 정조의 인사는 꽤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를 ‘조선의 르네상스기’라 부른다.그 시기에 정조는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을 건립해 학문과 문예를 부흥시키고 농업과 상공업도 발전시켰다. 정조가 좀 더 긴 시간 조선을 다스렸다면 세종을 뛰어넘는 ‘대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여러 학자들은 추측한다.


정조의 인사가 성공한 이유
정조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군주였다. 그는 신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기를 즐겼으며, 현존하는 어찰(임금의 편지)을 가장 많이 남긴 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정치사상이 맞지 않으면 등용조차 거부했던 영조와 다르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신하조차도 끊임없이 회유하며 자신의 사상에 동조할 것을 적극 권장했다. 왕의 이러한 노력으로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은탕평책이 국정을 발전시키는 좋은 촉매제가 될 수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인재를 고루 등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뜻을 모아 둘 다 탕평책을 선포했지만 역사가 기억하는 진정한 인사(人事)를 이루어낸 임금이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람에 대한 생각과 애정이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곱씹어보며 미래의 인사 실무자들이 될 <Job Times> ‘인사편’ 독자들이 머지않아 정조를 닮은 실무자가 되길 소망해본다.

 

 

정주희 기자 jjh@job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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