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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보는 최초 시리즈 - 가공식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잡코리아 2015-12-30 10:00 조회수5,866

모든 것에는 처음이 있다. 자취생의 빈곤한 밥상을 채워주는 참치 캔과 햄 통조림도 누군가가 만들어냈기에 지금 우리가 감사히 먹을 수 있는 것. 인간의 훌륭한 발명품 몇 가지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발전해 왔는지 좋은일 연구소가 소개한다.

 

자취생 필수품, 가공식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세 가지, 의식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식(食)’이다. 지금은 통조림, 레토르트 식품 등 가공식품을 흔히 볼 수 있지만 과거엔 식품을 상하지 않게 저장하는 것이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최초의 가공식품은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가공식품은 통조림이다. 1804년 프랑스의 요리사 니콜라스 아베르가 고안한 병조림이 그 시초로, 나폴레옹이 쉽고 간편하게 병사들이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을 만들기 위해 식품보존법을 공모한 것에서 비롯됐다. 입구가 넓은 유리병에 식품을 넣고 끓는 열탕에 담가 충분히 가열한 후 내용물이 뜨거울 때 코르크마개로 밀봉하는 방식의 병조림으로 그는 상금 1만 2천 프랑을 받았다. 그 후 깨지기 쉬운 유리병의 단점을 보완, 1810년 영국의 피터 듀란드가 양철을 오려 납땜으로 만든 양철 용기를 사용하는 법을 고안해 현재의 통조림 같은 형태가 생기게 됐다. 듀란드는 주석 깡통을 사용한 밀봉용기로 특허를 획득했고 이 통조림 기술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최초의 천체망원경
최초의 망원경은 1608년 네덜란드에서 한스 리퍼세이가 발명한 굴절망원경이지만, 최초의 천체망원경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10년에 제작한 것이다. 그는 1609년 봄 리퍼세이가 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접안렌즈에 오목렌즈를 사용해 3배율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곧 32배율로 개량했다. 그는 1610년 초반까지 이 망원경으로 천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발견을 많이 해냈다. 목성의 위성, 달 표면이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 은하수가 많은 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등을 발견해 그는 곧 유명해졌다. 지금은 상식처럼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엔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는 태양의 흑점, 토성의 띠 등도 관측했다. 이 망원경은 갈릴레오식 망원경으로 불린다. 상이 뒤집히지 않고 바로 보이게 해주지만 시야가 좁아 현재는 지상망원경이나 오페라 글래스로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 요하네스 케플러는 볼록렌즈를 사용한 굴절망원경을 만들어 지금도 널리 쓰이는 대표적 형태를 만들어냈다.

 

마법의 조미료 라면수프의 탄생

 


인스턴트 라면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이 건면을 튀겨서 휴대하고 다니던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1958년 일본의 닛신식품이 내놓은 ‘치킨라멘’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이다. ‘치킨라멘’은 일본식 라멘에서 흔하게 쓰이는 닭뼈 육수에 착안, 그와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 분말을혼합해 만든 것이다. 기본적인 베이스가 되는 조미료는 이노신산과 글루타민산나트륨 등이다. 이노신산은 육류계의 감칠맛을 내며 글루타민산나트륨은다시마에서 추출한 글루타메이트로 만든 조미료로,가다랑어나 다시마 육수 같은 해산물 육수의 감칠맛을 낸다. 글루타민산나트륨은 1908년 이케다 키쿠나에 교수가 처음 만들었으며 ‘MSG’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조미료다. 이노신산은 그보다 조금 늦은 1913년 고다마 신타로가 처음 발견했다. 리보뉴클레오티드이나트륨 등도 라면수프에 즐겨 사용되고 있다.여기서 아마도 누구나 알고 있을 정보 하나.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1960년 삼양식품에서 만든 ‘삼양라면’이다.

 

여성들의 필수 아이템,화장품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화장품은 기원전 350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꾸준히 사용돼왔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또한 화장품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화장품은 독성이 있는 수은이나 납이 포함돼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국내 최초 화장품은 무엇이었을까? 공산품으로 판매된 최초의 국산 화장품은 ‘박가분’이다. 1900년대 초반 개화의 바람과 함께 일반 여성들 사이에서 화장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비싼 외제 화장품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서민들은 분꽃의 열매나 쌀가루로 백분을 만들어 사용했다. 서민들은 직접 백분을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박승직은 이에 착안해 박가분을 만들었다. 박가분은 외제 화장품에 비해 저렴한 가격과 은은한 향기에 1만갑 이상 팔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냥 종이에 싸서 팔던 다른 백분과 달리 브랜드가 인쇄된 라벨을 상자에 붙여 브랜드 가치를 높인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박가분도 고대 화장품들이 그러했듯 납 성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박가분을 사용한 여성들이 납중독에 걸려 얼굴이 푸르게 변한 탓에 박가분의 매출은 크게 떨어졌다. 납 조각에 식초를 붓고 열을 가해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납꽃’ 때문이었던 것. 박승직은 납중독의 심각성을 깨닫고 제작 방식을 바꿨지만 이미 납중독 화장품으로 소문이 난 탓에 재기는 어려웠고 일본 화장품 업체의 진출로 인한 탄압으로 1937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혜경 기자 hklee0726@job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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