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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의 표출, 6.25전쟁 1분만에 알아보기

잡코리아 2016-06-24 10:00 조회수4,985

 







(이미지 = 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 DB)

 

6.25 전쟁이 일어난지 올해로 66주년이 지났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잠시' 멈춘지 63년째가 되는 해이다. 한국전쟁이라고도 불리는 6.25전쟁은 한 민족이 총을 겨눠가며 싸운 '민족전쟁'인 동시에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된 '이념전쟁'이기도 하다. 6.25 전쟁 발발 이유부터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어떠한지 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가 정리했다.

 

 

6.25 전쟁 흐름

  

가혹한 일제통치 아래 암울한 시대를 겪은 대한민국. 1943년에 들어서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흘러갔고 결국 일본은 항복은 선언하게 된다. 이로써 민족의 독립을 맞이한 대한민국은 하나의 국가로서 완전체를 이루는듯 싶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우리나라는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라는 명목 아래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가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이 참여한 가운데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관한 의제와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 의제를 논의했다. 모스크바삼상회의를 계기로 더욱이 이북과 이남의 이념 대립은 더욱 강화되었다. 

 

1948년 5월 31일 남한에서는 제헌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공포된 데 이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이 정부가 수립되었다. 머지않아 북한 역시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의 주도 아래 북한정권을 수립되었고, 38도선을 경계로 한 민족이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졌다.
 
서로 상반된 이념을 가지고 전개됐던 한반도 위 두 국가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고 만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소련과 북한의 힘을 업고 한껏 기세가 오른 북한에 비해 남한은 군사력이 약했다. 이에 남한은 기습남침 이후 별다른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전투 시작 사흘 만에 서울을 뺏긴다. 비참한 전쟁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난민들은 휘어진 한강철교를 통해 남(南)으로, 남(南)으로 이동한다.

 

1950년 7월 17일, 심각해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고 곧바로 지원인력이 투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군과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리게 됐다. 당시 남한의 병력은 이미 손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학도병들이 전쟁에 참여한다. 좀처럼 고전을 면치 못하던 남한과 미군은 승기를 잡기 위해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한다. 1950년 9월 15일 월미도를 통해 인천 상륙을 성공한 연합군들은 서울을 수복하고, 이 기세를 몰아 ‘북진 통일’을 이루려 했고, 이에 같은해 10월 1일 38선을 돌파해 압록강까지 진군한다.

 

하지만 남한과 미군의 기세도 잠시, 북한군은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을 요청하여 전세를 역전 시킨다. 중공군의 공세로 북한군이 서울을 재점령하게 된 이 사건을 바로 1.4후퇴라고 부른다.

 

이 이후로 38선 근처에서 북한군과 남한군은 크고 작은 공방전을 엎치락뒤치락 이어졌다. 1년간 쉬지 않고 계속됐던 전쟁 탓에 남북한은 물론 미군이나 중공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1951년 7월부터 휴전을 위한 회담에 들어섰다. 휴전협정을 체결하는데 까지 난항을 겪으며,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이 발발 된지 3년 1개월만에 휴전협정이 마무리됐다.

 

 

6.25 전쟁의 결과

 

6.25 전쟁으로 한반도는 처참하게 망가졌다. 개인의 집이나 재산상 피해가 심했던 것은 물론 도로, 철도, 교량, 항만 및 산업시설, 학교, 공공시설 역시 처참하게 파괴되어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인명 피해도 심각했다.  3년 1개월간 진행된 6.25 전쟁으로 한국군 및 유엔군 178,569명이 전사했고 555,02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2,769명이 실종을 당하가나 포로로 끌려갔다. 북한군은 800,000명 중공군은 1,230,000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1951년 3월 기준  6,514,582명의 피난민이, 100,000명의 고아가 발생하고, 6.25 전쟁으로 인해 10,000,000명이 이산가족이 되었다고 전한다.

 

 

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ㅣ 이슬비 인턴사원 drizz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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