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말의 개념과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명령의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2년여간 교수 연구실 조교를 담당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대학원생이 아닌 학부생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수님이 원하는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고, 제 권한 범위를 명확하게 인지했으며, 모호한 경우 보고를 통해 지침을 재확인 받는 저의 프로세스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은 연구에만 신경 쓰시면 되었습니다. 교수님께 오는 서면 또는 대면 인터뷰 요청, 자문요청, 세미나 참석 등 대부분 일정을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정도만 신경 쓰시게" 해드렸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관리자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관리자였다면 내렸을 결정을 제 권한 내에서 처리 할 줄 아는 사람"이 제 롤모델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갈등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10여개대학 연합 토론 동아리 `한앎`에서 2009~2011년까지 토론 사회자를 맡아 활동했습니다. 토론 양 진영 의견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게하며 적절한 충돌과 경합을 만들어냈습니다. 토론시간은 1시간 30분에서 45분으로 줄었고, 토론분량은 줄었으되 핵심 문제 사안을 명확해졌습니다. 토론의 양 진영의 상호이해와 공감은 깊어졌습니다.
토론동아리라 해서 논리적 문제해결만 느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 교외 연합 동아리이기 때문에 다양한 출신학교와 출신지역, 성격을 가진 참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여대를 다니는 학우, 아르헨티나에서 중 고교시절까지 보내 우리나라의 주입식 대입수험을 겪어보지 못한 학우, 군인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란 학우들이 있었습니다 .
각각의 성장 환경 속에서 다른 인성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논쟁 속에서 제가 느꼈던 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듣지 않는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한 가운데 매개자로 섰습니다. 이때는 사실 논리적 해결이기보다 먼저 건네는 이해와 공감을 통한 감정적 해결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고객서비스를 제공할 때 "내가 옳은가, 절차적으로 정당한가" 여부 보다 "고객의 감정이 해소되었는가, 내가 먼저 고객의 감정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할 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역아동 센터에서 한 부모 가정 청소년 학습지도를 해왔습니다. 여타 기관보다 그곳에서 봉사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저 또한 한 부모 가정에서 자라왔기에 어떤 다른 자원봉사자보다도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봉사기관에서만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집과 가까이 살고 있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부모에게도 얘기할 수 없고 친구들에게 얘기할 수 없는 오직 저만 이해할 수 있는 고민을 만나서 듣고 공감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봉사하는 활동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통하여 절 스스로 돌아볼 수 있었던 기회 였습니다. 저는 공감의 폭이 넓어진 사람입니다.
저는 작은 책무에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충실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군 생활중 보병병과 전투분대장으로서 초임 분대장 교육대 파견교육시에도 사단 교육수료자 80여명중 종합 2위로 사단장 표창을 받았습니다. 전군에 수많은 분대장들이 있습니다. 저 하나는 그들 모두 중 의미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유사시 분대원들이 나의 무능으로 잘못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노력하여 수상하였습니다. 전역한지 5년이 넘은 지금, 여전히 절 분대장이란 직책으로 불러주는 후임병 두 동생들이 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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