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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소서

과학기술인공제회 2016년 하반기 신입 경영·비즈니스기획합격자소서

합격자 정보

  • 서울4년
  • 학점 3.43/4.5
  • 토익 780
  • 오픽 IM2
  • 자격증 1개
  • 수상 1회
  • 4,835읽음

합격자소서 질문 및 내용

답변
저는 가족을 화목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누나를 사고로 잃고난 뒤 한숨과 근심으로 채워진 가족의 빈 곳을 웃음으로 채워가는 사람입니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와 힘든 집안 환경 때문에 집을 나가 살았던 작은 누나에게 삶의 즐거움을 되찾아 주었던 사람입니다 . 나는 가족의 갈등관리자입니다. 모녀간 자매간 갈등을 표면으로 이끌어내고 지난날을 서로에게 반성하는 기회를 갖게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스스로 행복을 느끼며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전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

저는 긍정의 에너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초 중고등학교 동안 급식비 지원과 기초생활대상 가구로 학비지원을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고교 2학년 저는 당당히 모든 학우들 앞에 나가 이번 학비지원자 명단에 제 이름이 누락되었음을 선생님께 밝혔습니다. 대학 재학 중 방학 때 대개 일을 했습니다. 2~3개월 방학기간 안산 반월공단에서 주야 2교대로 3번의 등록금을 벌었습니다 . (주)ooo 기업 난로생산라인에서 시간당 700여개의 등유난로 유량계를 조립하였습니다. 생산 라인 중 최선두 1번자리였습니다. 내 뒤로 보내질 조립품이 지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작업반장님은 너처럼 오래 버티는 애는 처음이라며 그만두는 날 기꺼이 제게 너처럼 오래 버틴 애는 처음이라며 정직원이 되길 권유하셨습니다 .

이듬해 ooooo 기업에서는 생애 가장 뜨거운 겨울을 보냈습니다. 영하의 기온이었지만 작업장은 언제나 뜨거워 반팔 티만 입었습니다. 팔뚝은 고압프레스에서 나온 알루미늄 판에 데어 긴 화상 자국이 남았습니다 .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어서 힘이 났습니다 .

저는 가족의 신뢰를 얻은 사람입니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저는 대학재학 중 행정고등고시에 도전했습니다. 휴학 2년동안 누구보다 열심히했고, 2번의 1차합격의 영예도 얻었습니다. 취업으로 얻을 가정경제 개선이 현실적이었겠지만, 어머니는 저를 믿고 후원해주었습니다. 제가 이루어 낼 것을 의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최종합격에 실패한 뒤, 좀 더 작은 집으로 이사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너의 성실함과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취업의 길을 걸어도 성공할 것을 믿어주는 누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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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저는 사람에 대한 관찰력이 좋아 예의바른 사람입니다 . 교수님이 고개를 두리번하시는 동안 옆의 두신 안경을 들어 건네드리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표정과 행동에서 미리 알고 그에 대해 공손한 응대를 하는 것이 저의 첫째 장점입니다. 처음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작은 행동에서 상대의 심려나 요구에 대한 것을 알고 대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고객의 대한 응대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행동하겠습니다 .

저는 공적인 사무를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법학을 전공하면서 구두로 이루어진 논의보다 공식적인 문서의 중요함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꼼꼼한 문구 해석과 일처리로 재작업 부담을 줄이고, 내 사무를 전달받을 동료를 배려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2년간 대학 연구실과 2 개월간 SAP 교육 조교를 담당하며 학생들의 출결, 평가, 연구비 관리 등을 모두 증명서류와 영수증으로 파일을 만들어 관리하였습니다. 학과 사무실, 교육기관에서 증빙을 요구할 때 언제는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항시 소지하였습니다.

또한 친분과 금전관계는 공무에서 구별된다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고교 3학년 선생님이 학급임원이 아니었던 저에게 학급공금을 맡기고 관리하시면서, 네가 가장 믿음이 간다는 말씀이 현재까지 저의 깨끗한 금전관계에 대한 자부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원리와 원칙에 충실하였습니다. 고교 3학년 선생님이 학급임원이 아니었던 저에게 학급공금을 맡기고 관리하시면서, 네가 가장 믿음이 간다는 말씀이 현재까지 저의 깨끗한 금전관계에 대한 자부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예의, 배려와 공무에 대한 엄격함이 때론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곤 했습니다. 온정이 미덕인 우리나라 풍조에서 종종 저에게 편법적인 요구를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 저보다 연장자이시거나 상급자일 때는 더욱 어렵습니다. 사소한 것이라 생각하셔서 혹은 문제없을 것이란 이유로 본인 편의를 봐주시길 바라시는 분이 거절당하셨을 때 , 제 평판을 폄훼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심적으로 힘든 입장이지만 원리와 원칙에 충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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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저는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말의 개념과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명령의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2년여간 교수 연구실 조교를 담당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대학원생이 아닌 학부생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수님이 원하는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고, 제 권한 범위를 명확하게 인지했으며, 모호한 경우 보고를 통해 지침을 재확인 받는 저의 프로세스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은 연구에만 신경 쓰시면 되었습니다. 교수님께 오는 서면 또는 대면 인터뷰 요청, 자문요청, 세미나 참석 등 대부분 일정을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정도만 신경 쓰시게" 해드렸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관리자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관리자였다면 내렸을 결정을 제 권한 내에서 처리 할 줄 아는 사람"이 제 롤모델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갈등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10여개대학 연합 토론 동아리 `한앎`에서 2009~2011년까지 토론 사회자를 맡아 활동했습니다. 토론 양 진영 의견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게하며 적절한 충돌과 경합을 만들어냈습니다. 토론시간은 1시간 30분에서 45분으로 줄었고, 토론분량은 줄었으되 핵심 문제 사안을 명확해졌습니다. 토론의 양 진영의 상호이해와 공감은 깊어졌습니다.

토론동아리라 해서 논리적 문제해결만 느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 교외 연합 동아리이기 때문에 다양한 출신학교와 출신지역, 성격을 가진 참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여대를 다니는 학우, 아르헨티나에서 중 고교시절까지 보내 우리나라의 주입식 대입수험을 겪어보지 못한 학우, 군인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란 학우들이 있었습니다 .

각각의 성장 환경 속에서 다른 인성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논쟁 속에서 제가 느꼈던 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듣지 않는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한 가운데 매개자로 섰습니다. 이때는 사실 논리적 해결이기보다 먼저 건네는 이해와 공감을 통한 감정적 해결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고객서비스를 제공할 때 "내가 옳은가, 절차적으로 정당한가" 여부 보다 "고객의 감정이 해소되었는가, 내가 먼저 고객의 감정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할 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역아동 센터에서 한 부모 가정 청소년 학습지도를 해왔습니다. 여타 기관보다 그곳에서 봉사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저 또한 한 부모 가정에서 자라왔기에 어떤 다른 자원봉사자보다도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봉사기관에서만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집과 가까이 살고 있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부모에게도 얘기할 수 없고 친구들에게 얘기할 수 없는 오직 저만 이해할 수 있는 고민을 만나서 듣고 공감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봉사하는 활동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통하여 절 스스로 돌아볼 수 있었던 기회 였습니다. 저는 공감의 폭이 넓어진 사람입니다.

저는 작은 책무에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충실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군 생활중 보병병과 전투분대장으로서 초임 분대장 교육대 파견교육시에도 사단 교육수료자 80여명중 종합 2위로 사단장 표창을 받았습니다. 전군에 수많은 분대장들이 있습니다. 저 하나는 그들 모두 중 의미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유사시 분대원들이 나의 무능으로 잘못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노력하여 수상하였습니다. 전역한지 5년이 넘은 지금, 여전히 절 분대장이란 직책으로 불러주는 후임병 두 동생들이 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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