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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그룹 역사에세이

2015-09-25 12:40 조회수 5,705 댓글수5


 


현대자동차 그룹 역사 에세이


 


───────────────


예상질문 13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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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에세이 분석  및 작성전략


 


최신 기출 문항


 


 


 


 


 




역사 에세이란?


 


 


 


최근 인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기업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기업의 이러한 관심은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파악하여, 인간 즉 고객이 원하는 기술,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기본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지식이나 소양도 마찬가지의 측면에서 과거의 사건, 인물 등의 역사를 통해 깨달음과 배움을 얻어 현재를 아우르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고, 이를 현시점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기업의 판단인 것이다.  


 


2013년 11월 경영회의에서 “국사공부를 하라. 역사관이 뚜렷한 직원이 자신을, 회사를, 나아가 국가를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했던 정몽구 회장의 의중이 담겨있는 것이 바로 현대자동차그룹의 역사 에세이다. 서류전형에 합격하면 HMAT과 함께 역사 에세이를 치뤄야 한다. 


 


2013년 하반기에는 넓은 범위 안에서 지원자가 인물과 사건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문제의 유형이 점차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역사 에세이를 통해 지원자의 역사적 소양과 가치관을 검증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표현하는지도 함께 파악하고 있다. 


 


역사 에세이와 역사 시험의 차이는 정해진 답이 없다는 점이다. 정답이 없는 만큼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를 암기하는 등의 공부는 필요하지는 않으나 평소에 역사적 소양을 쌓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현재와 연결하여 의견 정리해두어야만 한다 특히, 현대자동차그룹은 면접에서도 지원자의 역사관을 묻고 신입사원교육에서도 역사 교육을 진행할 정도이기 때문에 평상 시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해두자.


 


역사 에세이 시험은 2~3문항이 출제되며, 세계사가 포함된다. 시험 때마다 주어진 시간과 글자수의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40분 안에 두 문항을 각각 700자 이내로 작성해야 한다. 면접에서 활용되기 때문에 시간 배분에 유의하여,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역사 에세이를 통해 알고 싶은 것은 역사적 지식이 아닌 현재 지원자의 가치관과 생각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현대자동차그룹 역사 에세이 특징


 


 



 


현대자동차그룹은 HMAT을 실시하면서 지원자의 인성과 역사관을 파악하기 위해 2013년도 하반기 공채부터 역사 에세이를 출제하기 시작했다. 역사 에세이를 통해 이공계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과 통찰력을 평가하여 창의적인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시행 목적이다. 기출 문제들을 살펴보면 인물 3문제, 정치 1문제, 경제·사회 2문제, 문화 1문제, 대외관계 1문제, 기타 1문제로 총 9문제가 출제되었다. 


 


▲인물 분야에서는 신사임당은 살아생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에 아들 율곡 이이 등 사람이 정권을 잡고 신사임당을 숭배하면서 부각되었다. 본인의 관점에서 역사상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 쓰라는 내용이 주어졌다. ▲문화 분야에서는 석굴암, 불국사, 가야고분, 남한산성, 고인돌 등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 유산 두 개를 골라 그 이유를 물었다. ▲ 경제·사회 분야에서는 몽골과 로마 등 두 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와 현대차가 세계화 및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 두 제국에서 배워야 할 점에 대해 에세이를 요구했다. 


 


시대나 연대별로 문항이 출제되었다기 보다는 인물, 문화재, 사건을 중심으로 범위를 두고 있어 역사적 지식에 대한 단순 지식을 묻고 있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세계사의 범위까지 출제되고 있기 때문에 세계사까지 넓은 범위의 학습을 요하나, 역사적 사건 연대기나 수치를 외우는 공부는 불필요하다. 넓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미리 미리 정리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 에세이 유형분석


 


역사 에세이는 2013년 하반기부터 2015년 상반기까지 실시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역사 에세이 항목을 통해 출제유형을 도출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역사 에세이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특정한 역사적 사실이 주어지고 이에 관한 유사사례를 기술한 후, 현재와 연결하여 지원자의 의견을 작성하는 문제 혹은 현대자동차그룹과의 관련성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고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지원자의 역사의식과 논리력을 알아보는 ‘역사의식 확인형’이다.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지원자의 역사의식을 통해 현재 지원자가 가진 가치관을 살펴보고 자신의 의견을 현재와 연결하여 논리적으로 표현하는지를 확인한다. 두 번째 유형은 지원자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고, 역사적 사건을 현대자동차의 발전과 연계할 수 있는 창의력을 확인하는 ‘상황 분석·제시형’이다.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역사 에세이를 출제하는 것은 현대자동차의 현재 상황에 대해 인식하고 회사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지원자의 생각을 알고자 하는 것이므로 역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정리와 함께 현대자동차 그룹이 직면하고 있는 현황에 대한 기업분석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역사 에세이 유형에 따른 기출문제를 살펴보자


 


 


※ 역사 에세이 유형




 


 


 


 


역사 에세이 작성전략


 


역사 에세이는 얼마나 많은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서술할 수 있는지를 보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역사적 지식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지식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의견을 제시하는데 당연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서류전형이 끝난 후 시행되는 HMAT일정상 역사적 지식을 모두 공부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출문제와 예상문제를 풀어보는 것이다.  


 


40분 안에 2개 문항, 각 700자 이니 1,400자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이공계지원자들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때문에 몇몇 지원자는 분량을 채우는 것 조차 어려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미 없는 내용으로 글자수를 맞추는 것은 금물이다. 


 


 


작성전략 1. 기승전’현재상황’, 기승전’현대자동차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이 원하는 역사 인식은 결국 회사의 발전을 이루기 위한 토대라는 것이 에세이 작성전략의 핵심이다. 주어지는 에세이 주제가 무엇이든 결국 알고자 하는 것은 현대자동차그룹의 현재 상황, 방해요인에 대한 지원자의 시각과 이를 발전적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논리적인 의견이다. 결국 역사 에세이 작성 시에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발전과 회사에의 기여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현대자동차그룹에 대한 분석과 업계분석, 현황분석 등에 대한 지식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역사 에세이 기출문제 (2015년 상반기)


 


194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사건이 미국 탄생의 토대라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원주민 약탈이라는 부정적인 부분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시오. 


 


[답변 구조] 


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의 긍정 혹은 부정에 대한 선택  ② 긍정(부정)을 선택한 자신의 의견 제시  ③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대한 긍정(부정)적인 측면을 현대자동차그룹의 현시점에 연결  ④ 앞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이 나아가야 할 방향 제시 


 


작성전략 2. 창의적인 내용으로 승부하자.


화려한 문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이 되는 구조와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가 중요 포인트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어떻게 작성할지에 대한 전략을 세워 글을 실제로 작성해보는 연습을 하자. 역사 에세이를 타 지원자와 차별화 할 수 있는 방법은 창의적인 내용과 논리적인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논술형 질문은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남들과 똑같은 답변은 차별화 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창의적인 발상을 드러내야 한다.  창의성을 어필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전혀 새로운 것을 융합하는데 있다. 예로는 하이브리드가 대표적이다.


 


단, 역사 에세이에 담겨야 하는 창의성은 주어진 조건에서 타 지원자와 구별되는 차별성이지 무한을 대상으로 상상력을 펼치는 창의성이 아니다.  과학자를 탄생시키는 상상력이 아님을 명심하자.  


 


 


작성전략 3. 논리력을 고양시키자. 


역사 에세이와 같이 자신의 의견을 서술해야 하는 논술 에세이는 보통의 서론-본론-결론 형식의 글씨기가 아닌 질문에서 요구하는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제시부터 시작해야 한다. 주어진 문제에 대한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지식을 동원하여 간략하게 제시하고, 자신이 내린 판단과 평가를 의견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논리의 핵심은 문제파악, 자신의 판단과 평가의 과정이 역사적 사실이나 기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역사 에세이 기출문제 (2015년 상반기)


 


현대자동차그룹의 기업이념 5대 가치(고객 최우선, 도전적 실행, 소통과 협력, 인재 존중, 글로벌 지향) 중 2가지 이상을 골라 역사적 사건과 연계해 설명하시오. 


 


[답변 구조] 


① 현대자동차그룹과 자신의 직무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2가지 가치 선정  ② 선정 가치에 대해 긍정적인 면 혹은 부정적인 면을 확인 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서술  ③ 역사적 사건이 현대자동차그룹에 시사하는 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


 


 


 


 


 


역사 에세이 예상질문


 


 


인물


 








 예상질문


 징기스칸과  알렉산드로스 3세는 위대한 정복자라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정복의 업적에 대하여 역사가들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고, 그 두 명의 정복자에게 오늘날의 리더가 배워야 할 점을 쓰시오.




STRATEGE


징기스칸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의 뛰어난 전략이고 나머지는 정복한 지역에 대한 교화정책이다.  뛰어난 전략에 초점을 맞춘다면 오늘날 리더들이 본받아야 할 점은 인재 활용 능력, 추진력, 결단력 등을 들 수 있겠고, 정복한 지역에 대한 교화정책을 생각한다면 글로벌화, 다문화 사회 등의 이슈에 직면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리더들이 어떻게 문화를 존중하고 융합해야 할 지에 대한 의견을 기술할 수 있다.


 


징기즈칸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통치법 


<징기즈 칸의 통치법>


징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징기스칸의 손자인 모토칸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징기스 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통치법>


알렉산드로스는 동서 융합책을 꾀했다. 우선 다수의 그리스 사람을 소아시아(현재의 터키)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과 피정복 지역의 주민들을 결혼시켰고 페르시아인 관리들을 등용했다. 그 자신도 페르시아의 군주이자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페르시아 여성과 자신의 그리스 군인들간의 사실혼을 정식 결혼으로 인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서 융합 정책은 동방과 서방문화를 융합시켜 불교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고, 이로 인해 간다라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이 만들어졌다. 그는 정복지의 여러 곳에 알렉산드리아란 이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는 헬레니즘 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도시들 중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유명하다. 


 


정치


 







 예상질문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광해군의 개혁정치는 당시 많은 저항을 받았다. 광해군의 실리추구 정책이 현대자동차그룹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쓰시오.




STRATEGE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를 통해 현대자동차그룹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지원자의 통찰력과 의견을 확인하고자 하는 문항이다. 국가의 안정과 평화라는 큰 목표를 위해 많은 장애, 저항에 부딪혀도 해야 할 일과 필요한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실리주의 정책을 펼쳤던 광해군이었다. 그를 통해 현대자동차그룹을 이끄는 리더들이 배울 수 있는 점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면 된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정책, 임진왜란이라는 시기의 위기관리 능력과 리더십,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빠르게 복구하기 위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등 광해군의 실리추구 정책을 현 시점의 현대자동차그룹의 사업 및 기업운영에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기술하자. 


 


광해군의 개혁정치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압록강 북쪽에 살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광해군과 북인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동법의 시행과 은광 개발 등 적극적인 사회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으며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 받지 않았다.  이와 같이 광해군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 외교를 전개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북인은 서인과 남인 등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다. 광해군도 불안정한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영창 대군을 살해하고 인목 대비를 유폐하여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무리한 토목 공사를 벌여 재정의 악화와 민심의 이탈을 불러왔다.  결국 광해군과 북인은 1623년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으로 몰락하였다..


 


인조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1627년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와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이렀다.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경제 · 사회


 







 예상질문


조선 영조의 인재등용 정책인 탕평책이 오늘날 기업의 인재 선발 방식에 시사하는 바에 대해 쓰시오.




STRATEGE


탕평책은 당론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여 당파간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인재 등용 정책이다. 오늘날 탕평책의 근본적인 목적인 붕당(사내정치)의 약화와 왕권(오너)의 권력 강화에 직접적인 시사점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학연과 지연에서 벗어나 능력 위주의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는 그 선발방식만은 현대에서도 배워 할 점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영조의 탕평책


조선은 양 난 이후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3사의 언론 기능과 이조 전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특히 언론 3사의 기능과 전랑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각 붕당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고 붕당 간의 대립을 격렬하게 만들었고, 영조는 이러한 붕당 정치의 변질을 막기 위하여 탕평책을 통한 탕평 정치를 펼침으로써 붕당의 폐단을 혁파하였다.


 


‘탕평’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즉위 직후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자신이 노론과 소론을 번갈아 등용하여 오히려 정국을 더욱 어지럽게 하였다.  1728년(영조 4년)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는 영조의 정통을 부정하고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하면서 영조의 탕평책과 노론 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영조의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붕당 간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여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였다. 이에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하고 어느 붕당에도 속하지 않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다. 이에 정치 권력은 왕과 탕평파 대신 쪽으로 집중되었다.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1750년 군역 부담을 완화하기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고, 군영을 정비하여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세 군문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특히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또한, 이러한 제도와 권력 구조의 개편 내용을 정리하여 속대전을 편찬함으로써 법전 체계도 재정리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소론 강경파가 자주 변란을 일으키면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은 약화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탕평 정치는 왕이 중심이 되어서 붕당 정치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붕당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고, 사회 경제적 변화 위에서 지배층에게 부분적인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탕평 정치는 근본적으로 왕권을 중심으로 권력의 집중과 정치 세력의 균형을 꾀하면서 기존 사회 체제를 재정비하여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러 정책들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정치 운영에서 왕의 개인적인 역량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어서 탕평 정치가 구조적인 틀을 갖추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문화


 







 예상질문


일본은 조선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조선의 저항을 철저히 말살하기 위해 취한 민족문화말살정책을 펼쳤다. 이에 대항하여 우리 선조들이 문화적으로 저항한 사례를 선정하여 설명하고, 문화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중요성이 무엇인지 기술하시오.




STRATEGE


문화는 역사를 통해 형성되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삶의 방식이자 정신적인 공유가치이다. 우리 선조들이 일본이 조선 식민통치 시대에 민족문화말살정책을 펼친 것에 저항하여 고유문화를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문화가 가지는 파급력과 중요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저항했던 사례와 함께 문화가 가지는 힘, 즉 파급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자. 문화의 파급력을 현대자동차그룹이 이용해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서술한 후, 문화를 기업 기업 이미지 상승이나 매출로 연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시해보자.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 


일제는 조선 민족을 황국 신민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조선의 민족성을 아예 말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7년부터 ‘황국 신민 서사’라는 충성 맹서문을 만들어 외우도록 강요하였다. 이와 함께 전국의 모든 읍·면에 신사를 만들어 조선인을 강제로 참배시켰다. 1938년 학교 교육과 관공서에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대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다. 조선인의 민족성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선인의 정신이 담긴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940년에는 이미 친일 언론으로 변질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신문과 잡지를 없애버렸고, 1941년에 이르러 학교에서 조선어 학습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밖에 1939년부터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1941년에는 소학교를 ‘황국 신민 학교’라는 뜻을 가진 ‘국민 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교과 편성과 내용을 바꿨다.  이러한 여러 정책들은 조선 민족을 말살하고 조선 민중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심어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든 뒤, 일제의 침략 전쟁에 이용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은 조선인 학생을 식민 통치에 순응하도록 만들고,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천황에 충성하는 선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데 교육의 주안점을 두었다.


일제는 ‘근대 교육의 보급’이라는 이름으로 교육 시설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주로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조선인의 초등 학교 취학률은 일본인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상급 교육 기관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1910년대에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학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민족 교육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느낄 만한 교육 내용은 제외되었다. 민주주의 사상이나 문화 예술에 대한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대화의 기초가 되어야 할 과학 교육의 기회도 조선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실업 교육이 실시되었으나 고등 기술자가 아니라 기능인을 길러내는 데 그쳤다.


 


3·1운동 이후에는 보통 학교와 고등 보통 학교에 조선어를 필수 과목에 포함시키고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다루도록 하는 등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융화 정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에는 황국 신민화 교육을 더욱 강화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면서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내선 일체를 강조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초·중등 교육에서 조선어 과목과 조선사 교육을 아예 없애 버렸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를 억눌러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우리의 민족 문화를 말살하거나 왜곡할 목적으로 ‘조선사 편찬 위원회’를 만들어 자료집의 성격을 갖는 <조선사>를 편찬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 역사 전개의 기본 성격이 ‘정체성, 타율성, 당파성’에 있음을 강조하는 식민 사관을 체계화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각계 각층의 친일 세력을 육성하여 이들을 일제 식민지 문화 정책의 선전 도구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일제 말기에는 각종 친일 문화 단체가 만들어져 친일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친일 활동에는 이광수 등 문인은 물론, 교육, 예술, 종교계의 저명 인사와 많은 지식인들이 가담하였다.  또 일제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말살하는 대신에 교육 칙령과 신도 사상으로 우리나라의 청소년을 일본 문화에 강제로 복종시키려고 하였다. 


 


대외관계


 







 예상질문


맹자가 주장한 `이소사대(以小事大)`와 `이대사소(以大事小)`는 대국과 소국과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이 현대차 그룹과 협력사와의 관계에 시사하는 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STRATEGE


이소사대와 이대사소는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섬기고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섬긴다’는 의미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는 공생의 도리가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현재  현대자동차그룹은  많은 계열사와 협력사와 경제적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현대자동차그룹과 협력사와의 관계에서  상생을 위해 현대자동차그룹이 추구해야 할 자세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문항에서 제시된 이소사대와 이대사소에 빗대어 논리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다.  


 


맹자의 이소사대와 이대사소


맹자는 주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는 ‘이대사소와 이소사대의 양대 기준을 천명했다. 약소국이 국가적 긍지를 살려 강대국에 결연하게 대항하여 옥쇄하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국가 자체가 소멸하는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이 통례이기도 했다. 반면 힘의 논리를 앞세운 강대국에 주체성을 버린 채 노예처럼 복종할 경우, 나라를 보존하는 대가로 국가나 민족의 자존심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이소사대’는 사례가 흔하지만 ‘이대사소’는 그 유례가 별로 없다. 


 


‘이소사대’는 약소국이 자신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을 전제로 한 외교정책이다. 과거 강대국은 대체로 이를 인정했는데 반해, 근대의 강대국은 약소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말살하여 국가로서 존재하는 자체도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강대국이 국가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약소국의 문화를 근원적으로 말살하여, 원천적으로 이를 소멸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종교를 활용한 지는 오래되었다. 맹자의 주장대로 약소국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이소사대’라도 하게 하는 ‘인자’가 강대국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맹자는 ‘교린장交隣章’을 통하여 강대국 지도자는 ‘인자’여야 하고, 약소국의 지도자는 ‘지자’라야 한다고 논정한 후, 인자는 ‘대용’을 가져야 하지 결코 ‘소용’을 가지지 말기를 당부했고, ‘지자’는 천리를 두려워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논했다. 2500년 전에 논했던 맹자의 이 같은 외교론에 대해서 아마도 진부한 옛이야기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맹자는 ‘교린장’을 통하여 ‘이소사대’와 ‘이대사소’ 및 ‘대용’과 ‘소용’ 등의 명제를 제시한 후, 구체적인 사실을 들면서 논리정연하게 ‘외교론’을 개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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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발하나만 2015-09-29

    이중에서 제발 하나만 걸려다오!~ 답글달기

  • 오~ 2015-09-30

    역사에세이까지 준비가 되어 있다니!! 완전 굿굿~!! 답글달기

  • 꾸꾸까까 2015-09-30

    오 대박 꿀팀이네요 역사는 조금 힘들었는데ㅎㅎ 답글달기

  • 이건뭐 2015-10-05

    족보나 다름이없네
    물론 문항은 좀 달라지겠지만
    대충 어떤 느낌인지 캐치 완료 답글달기

  • 디자인생 2015-10-06

    감사합니다 ㅠㅠ저한테 필요한 인적성자료 답글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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